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문단 편집) === 소년 A === * 본명: 미야노 히로시(宮野裕史) → 요코야마 히로시(横山裕史) * 출생: [[1970년]] 4월 30일 (당시 18세, 현재 [age(1970-04-30)]세), [[카츠시카구]] '''극청회의 두목이자 해당 사건을 주도한 인물.''' 이 사건의 가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으로 평가받는 범인이다.[* 해당 살인사건 외에도 그가 저지른 범죄들까지 살펴보면 [[강간치상]], [[폭행]], [[살인미수]], [[강도강간]] 등 그에게 끔찍한 고통을 받은 피해자들은 약 100명은 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한민국에서도 이 정도 죄질은 '가정파괴범'으로 지칭하여 살인에 버금가는 흉악범죄라고 판단해 사형을 선고 및 집행한 적이 있었다. '''80년대 아다치구의 괴물'''이라고 평해도 손색이 없다.] 사건 이후 [[요코야마]](横山)로 [[성씨|성]]을 바꾸었는데 출소와 함께 다른 사람에게 [[입양]]되는 형식을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법원의 허가를 받으면 성씨를 변경할 수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해당 집안의 명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 기자가 그를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얼마나 악랄한지 알 수 있다. >기자: 왜 그녀를 납치했는가? >히로시: 충동적으로 그랬다. >기자: 그녀가 불쌍하진 않았나? >히로시: 불쌍했다. >기자: 그럼 왜 그녀를 폭행했는가? >히로시: '''스트레스 풀이.''' 신체적 특징은 [[왼손잡이]]에 재판 당시 뇌검사에서 전두엽측 지주막하낭종이 발견됐다.[* 뇌를 둘러싼 거미줄꼴 막인 지주막이 여러 이유로 인해 두 개로 나뉘어지고 그렇게 생긴 공간에 물혹이 차 낭종이 발생하는 것이다.] 재판 당시 "1년만 늦게 저질렀어도 너는 사형이었다"는 말에 '''"그랬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이런 짓을 하려면 미성년 시절 말고는 기회가 없다"''', '''"준코는 운이 나빠서 붙잡힌 것 뿐이다. 하필이면 나 같은 놈의 먹이가 됐으니"'''라는 망언을 했다. 할아버지는 군인, 야쿠자 출신의 정치인이었고 고모부 또한 야쿠자 간부였다. 아버지 미야노 히로후미(1942년생, 현재 [age(1942-01-01)]세)는 금융업계 사장이었으며, 어머니 미야노 시즈에(宮野静江, 1942년생, 현재 [age(1942-01-01)]세)는 피아노 연주 강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에겐 7살 터울의 여동생(1977년생, 현재 [age(1977-01-01)]세) 한 명이 있다고 한다. 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아버지가 다른 여자의 집에 거주하면서 간통하는 바람에 이때부터 삐뚤어져 문제 행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부모를 마구잡이로 구타했고 온몸에 타박상을 입힌다거나 갈비뼈를 골절시켜 중태에 빠트리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8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 일본 불량배들이 즐겨 하던 머리 모양인 펀치 파마를 했고 히가시아야세 중학교의 체육 특기생으로 유도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고 목검과 쌍절곤 같은 무기를 소지했으며 인근 학교에 쳐들어가 기물을 파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사이가 나빠 가출해서 거리에 주차된 트럭에 무단으로 올라가 자다가 신고를 받고 귀가 조치되는 일도 잦았다. 이밖에도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빽을 이용해 초등학교 시절 이미 [[카츠시카구]]와 인근 [[하치오지시]] 일대의 30여 개 초등학교의 또래들과 교직원들 사이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고 한다. 무력에 가치를 크게 두는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무렵부터 키가 작은 대신 몸집을 키워 싸울 때 날아가지 않도록 밥을 많이 먹어 체급을 키우고 멸치를 씹어먹으며 뼈를 강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팔굽혀펴기와 복근 운동 등의 근력운동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백 개씩 해 왔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카츠시카구의 지도를 빌려 펼쳐 보면서 구에 있는 모든 학교들을 일일이 찾아다녀 그 학교의 학생들과 맞붙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갓 입학할 시점엔 키가 160cm 정도로 유도부에 들어가기에는 왜소[* 2020년대 한국 중1 남학생 평균키가 160cm 안팎이므로 1980년대 일본인이 만 12~13세에 160cm 정도면 평균 이상의 키다. 체격이 어느정도 있어야 하는 운동하는 사람치고는 미야노 히로시가 왜소했다는 의미.]했지만 몸이 단단하고 다부졌기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선배의 추천으로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유도부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지역대회에서 체급 내 5위에 드는 정도였지만 실력이 나날이 발전해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과 준우승을 휩쓸 정도였다. 너무 강한 탓에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도쿄의 온갖 유도대회를 석권했고 중학교 동창들은 "소년 시절부터 몸을 쓰는 일뿐만 아니라 이름을 날리는 쪽으론 이골이 날 정도로 강했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카츠시카구의 남자들 가운데 무력 최강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고 증언했다. 중학교 시절엔 고등학생 불량배들과 싸움을 하고 다녔을 뿐더러 학교장 추천으로 사립명문 토카이대학 부속 사립 타카나와다이고등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강했다고 하며 고교 1학년 때 도쿄 전체에서 2~3학년을 모두 제치고 우승했지만[* 도쿄 전체를 통틀어서 동체급에선 최강이었다는 의미.] 상위 체급의 유도부 선배들에게 미야노 히로시의 부모가 고소할 정도로 심한 [[집단괴롭힘]]을 당했다.[* 85kg의 바벨을 1분 동안 머리 위로 40회 들어 올리도록 하거나 살충제 스프레이 캔에 라이터를 대고 화염방사기처럼 흩뿌리는 등 도를 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분풀이의 대상을 찾기 위해 집에 들어와선 부모와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집이나 거리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행인이나 불량배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폭행해 금품을 갈취하고 여자를 강간하고 다니는 미치광이가 됐다고 한다. 18세가 되던 해에 이 사건으로 체포되기 전까지 [[특수강간|무리를 지어 강간]]하고 다녔던 여성만 기억상으로 [[연쇄강간범|90명이 넘었다고]] 진술했으며[* 넘었다고 하니 100명은 될 것이다. 그와 그 패거리는 미인들만 타겟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마 준코가 희생양이 된 이유는 그녀가 미인이었던 점도 한몫 했을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준코를 감금했던 기간에도 다른 여성들을 몇 명씩이나 납치하거나 강간하고 다녔다. 다만 공갈협박을 했기 때문인지 신고한 여성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수위가 너무나 심해서 심지어 경찰마저 골머리를 썩히면서도 [[직무유기|손을 놓고 있었다]]. 고1 때 중퇴한 후 [[폭주족]]의 우두머리를 맡기 전엔 집안에서 미치광이처럼 집기를 모조리 때려부수고 다른 학교의 복도에 오토바이를 타고 쳐들어가 학생들과 교사를 마구잡이로 집어던지고 주먹 등으로 구타하는 등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력적인 문제아였다. 교사 6명이 몰려와도 떼어놓지 못해 경찰까지 출동해서야 겨우 떼어놓았다고 하는데 정말 경악스러운 건 경찰의 한심한 대응이었다. [[소년원]]에 보내져야 할 짓을 하고도 [[소년원]] 송치 및 보호관찰 정도로 끝났다. 물론 할아버지와 고모부의 빽도 있었지만. 게다가 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도 폭주족을 탈퇴한 동료를 찾아가 12시간 가량 집단 폭행해서 불구로 만들어 놓는다든가 지나가던 남성 2명을 다리 밑으로 집어던져 살인미수로 체포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렇다 할 처벌을 받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폭주족의 우두머리로 몸을 담던 시절의 후배 및 동료들에 따르면 자신에게 한 번 표적이 된 대상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집요하게 집주소와 동선을 파악시켜 야밤에 폭행해 반죽음 상태로 만들거나 납치, 강간을 하곤 했다고. 그랬기에 누구나 "미야노의 적이 된다면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으며 피해자들 가운데 강간 피해자만 최소 9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집안에 대해 비아냥거려도 뼈도 못 추렸다. 그야말로 좁게는 그 일대, 넓게는 일본 열도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들면 안 되는 위험 인물이었던 모양. 그래서인지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 녀석이라면 사람을 죽여서 훼손하는 것쯤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놀랍게도 중학교 때부터 야스시의 친누나와 연인으로서 동거하며 성인이 되면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18개월 정도 타일 제조 공장에서 일하다가 자동차 학교의 합숙장에서 친해진 폭력조직 불량배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소개로 [[긴자]]에서 생화를 팔았다. 하지만 적성에 안 맞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시너]]를 불게 되면서 더더욱 엄청난 폭력배로 변했다. 고교 중퇴 이후 자신을 동경하는 불량배들을 모아 아다치구를 근거지로 폭력 조직 극동회[* 신주쿠 카부키초를 근거지로 하는 야쿠자 조직. 현재 약 450명의 구성원이 존재한다.]의 청년부 조직 '극청회'를 결성했다.[* 일하던 꽃가게가 극동회 간부의 가게다. 후일 이 가게의 주인인 43세 극동회 조직원은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이유는 히로시 패거리가 밤까지 가게에서 일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강간, 상해, 약취, 강도 등의 강력범죄 이외에도 부하들을 시켜 일본인뿐만 아니라 서양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금품을 약탈하거나 생화를 말도 안 되는 고가에 강매하는 짓 따위도 꾸준히 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2006년]]에 가석방됐고[* 어머니 미야노 시즈에는 이혼 후 남편과 아들과 별거에 들어갔음에도 2006년까지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고 주변에서 그대로 살다가 아들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올 것이 무서웠는지 주소도 철저히 비밀로 부치고 이사를 갔다. 이후 신흥 [[사이비 종교]]에 열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7년에 걸쳐 [[사이타마현]] [[카와구치시]]의 용역 업체 미야우치 해체 공업소(宮内解体工業所)에서 일했다. 거주지는 [[카와구치시]] 하스누마 298번지 사카에하이츠 201호(埼玉県川口市蓮沼298 栄ハイツ201). [[2013년]] [[보이스피싱]] 사기 혐의[* [[파칭코]] 필승법으로 사기를 쳤다고 한다.]로 체포됐지만 묵비권으로 일관한 탓에 1월 31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다. 같은 형무소 수감자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뻘인 자신에게도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 왔고 항상 밝고 평안했다고 하며 보통 강력범죄를 저지른 수감자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그는 그런 것 없이 복역 기간 동안 잘 지냈다고 한다.[* 반면 일당들 중 가장 힘이 약한 와타나베 야스시는 형무소에서 폭행을 당해 장애가 생겼다.] 또 출소 후 이름을 바꾼 뒤에도 킥복싱 체육관을 다니거나 친한 후배와 유흥을 즐기는 등 잔인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가해자라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반성이나 죄책감 없이 [[일반인 코스프레|일상생활을 했으며]][* 출소 후 그와 친해진 사람들 모두 히로시가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범인이란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며 그가 살인사건의 주범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명이 떠 보자 창백해지면서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사기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 외제차를 타고 고가의 시계를 차며 명품 옷을 입고 다니는 등 청소년 시절에는 [[강간]], [[폭행]], [[상해]], [[강도]]가 주특기였다면 어른이 된 후에는 [[사기]]를 쳐서 무위도식하며 상당히 호의호식하고 희희낙락하면서 살던 것으로 추측됐으나 파멸했다.[* 물론 사기로 먹고 산다는 것 자체가 삶이 심각하다는 뜻이고 끝은 파멸이니 호의호식이니 할 리는 없다. 경찰에선 그의 사회복귀를 위해 수감 전 거주지에서 떨어진 곳에 집이나 일자리를 알아봐 줬다고 한다. 물론 주민들의 반대는 덤.] 최소한의 후회나 죄책감도 없음은 확실해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